Glocal Mission Summit 중에서 - Ruth Padilla DeBorst

Ruth Padilla DeBorst 가 Glocal Mission Summit에서 발표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번역: 김재영)


"관심이 확 당겼습니다. 사촌인 유니아가 거기에 가입했다니. 자기가 했던 결정 중에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게도 그 모임에 가입하라고 부추깁니다. 글쎄요 ... 나의 어머니와 삼촌은 서로 말을 섞지 않은지가 몇년째입니다. 어머니는 다이아나를 섬기고 있고, 삼촌은 농업의 신 새턴(Saturn)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삼촌 말에 의하면 세상에 새턴같은 신은 없다고 합니다. 난 개인적으로 비너스를 선호합니다. 비너스 신전의 후원자들은 가장 맛난 잔치를 배설합니다. 아다시피, 우리 민족에게는 신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 신들은 서로 다툼을 쉬지 않습니다. 그 신들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종파에 속한 사람들은 오직 한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래서 가족들이 섬기는 신들 때문에 나뉨도 없다고 유니아가 내게 말합니다. 우리 이웃 중에 사는 유대인들도 유일한 하나님을 섬김 이 신흥종교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다고 말하자, 유니아는 웃었습니다."


"한 번 얘기해 봐. 그리스 여성으로서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언제 전적으로 환영받는다고 느낀 적이 있어? 그들은 언니가 유대인이 되기를 기대해. 그래서 언니가 유대인들의 모든 전통에 순종한다고 해도, 언니는 그저 이류나 삼류에 불과할 거야. 언니는 결코 그들 중 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렇지만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달라. 모든 사람이 온전히 환영 받지!"

성경의 기록들과 성경 바깥의 기록들은 모두 그 길을 따르는 공동체들이 모든 종류의 종족들과 사회 계층들과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이 한 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서로 격려하며 보살피며, 그들의 재정을 나누고 그들이 있는 동네의 이웃들에게 호감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과 신약서신서들에서 모을 수 있는 내용에 덧붙여서, 고대 근동 학자들은 이 공동체들이 지니고 있는 대항문화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드니 스타아크( Rodney Stark)는 "이 삼백년 동안 이 보잘 것없는 운동이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될 수 있었는가?" 다른 역사가들의 의견과 더불어서 그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요? 그 길을 따르는 이들의 다양한 공동체들에 지도자들이 분명 있었지만, 이 공동체들이 성장한 배경에는 일반 신도들의 충성된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건물을 짓지 않았고, 출세를 위해서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이 낸 헌금들은 노예들의 자유를 사서 구해주고, 그들 가운데서 취약한 약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었던 일을 감당했던 순회 선교사들(사절들)을 후원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에 덧붙여서, 사람들은 전염병이 휩쓰는 도시들을 뒤로 하고 피신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병자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도시에 남거나 병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자기들의 신앙 까닭에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세를 취했고 박해하는 상대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경을 얻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다 알다시피, 다양성과 받아줌과 서로 돌봐줌과 재산을 나누는 일은 쉽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하게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새로 오는 사람들이 유대 전통과 유대 종교 관례에 순종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지배계층의 후원자 시스템 가운데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돈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식탁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나가시는 성령님의 역사 덕분에, 그러한 문화적인 시각에 반대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종족적인 거품을 훨씬 뛰어 넘어서 역사하고 계심을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의 경제를 새롭게 이뤄나감으로써 곤핍에 빠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기 위해서 희생적으로 바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옛 포도주가죽부대를 터뜨리고 나와서 그들의 스승의 신실한 교제에 속하는 문제를 재작성( Rewriting belonging)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속을 다시 쓰는 일! 그것이 바로 이번 성찰의 토픽입니다. 이 토픽은 여러분의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여러분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에 출발점으로 삼기를 바라서 잡은 것입니다. 속한다는 게 어떤 것인가? 그것을 다시 쓰십시오.


이제 나는 자신들의 자연적인 성향들에 따라 열었을 경우보다 문을 훨씬 더 넓게 열 필요가 있음을 분별했던 그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스토리를 읽고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스토리는 창조에서 새창조에 이르는 넓고 깊은 스토리였습니다. 우선적으로, 그 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도발적으로 외부인들을 수용하고, 나환자들을 만지고, 여인들을 긍정적으로 대하며, 적국인 로마 군인의 아들을 고쳐주며, 경멸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했던 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출발하시면서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쳤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거나 기억하고 있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 분위기 좋았던 안식일에 기쁨에 가득찬 회중이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경탄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분노의 군중으로 돌변했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두가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감히 히브리 (구약) 성경을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복수하심에 대한 구절을 빼내버리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던 이방 민족 출신들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이 어떻게 포용하는지를 말하는 도발적인 표현으로 대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혹 어쩌면 그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날 즈음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의 판매대를 둘러 엎었던 그 당혹스러운 날을 기억했거나 들어보지 않았을까 합니다. 처음에는 그 상황을 놓고서 그들이 엄청 당황했겠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이후에 성령께서 그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해력을 주셔서 그들은 문제가 환전을 하고 사고 파는 그 비즈니스 자체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한가지 문제는 '어떻게'(How)였고 다른 한가지 문제는 '어디에서'(Where)라는 장소의 문제였습니다. 첫째, 그 비즈니스는 비윤리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먼 곳에서 와서 성전에 바칠 제물들을 구매하기 위해서 그 제물들에 매겨진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가난한 순례자들을 등쳐 먹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둘째로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그 비즈니스는 성전 바깥뜰에서 이뤄지고 있었는데, 그 지역은 외국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사용하도록 외국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장소에서 거래가 이뤄지게 함으로써 성전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예배드리러 나오는 일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속하는 일을 박탈해 버렸던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노가 구체적으로 그 경건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터져나왔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비즈니스가 깨끗하게 이루어지도록 감독하고 또한 모든 민족들에게 성전이 개방되도록 할 책임을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들은 부당한 뒷거래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이문을 착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교회 지도자들은 그 스토리가 실질적으로 더 깊은 배경을 짚어나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눅 19: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이들이 (지금 우리가 아는대로는 이사야서 56:7에 있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라고 인식했을 익숙한 히브리 성경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6-7)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인용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율법을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그 율법은 과부들과 고아들을 포함해서 외국인도 하나님의 은총을 특별히 받는 자로서 환영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라는 규정이 있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그들의 시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던 스토리에 자신과 자신의 추종자들을 자리매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 가운데서, 하류로 취급당하던 팔레스타인의 먼지 투성이 길을 따라 따라다니던 예수님의 첫 추종자들은 그 옛 히브리 율법의 메아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율법은 그들의 이너써클에 속하지 못하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윤리적인 요구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통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3:22)


그렇다면,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 그 당시 사회에서 고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의 삶을 보살필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까요?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가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가지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33-34)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 차별을 제거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전심으로 환영할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9:35-36)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의 길을 따르는 일이 비즈니스를 정직히 행하고 경제적으로 공정하게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 24:22)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의 길을 따르는 일이 사회적이며 경제적이며, 종족적이며 정치적인 신분이며 혹은 출생지에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정체 체제 가운데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요구하고 있음을 깨닫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을 따랐던 첫 제자들이 써내려갔던 스토리를 압축해서 복습해 보도록 할까요? 창조에서 하나님은 공간을 여시고, 그 공간에 다채롭고 유쾌하며 아름답고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로 가득 채웠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손실과 박탈과 인간들이 구축해 놓은 국경선들 까닭에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의 존엄과 생활을 보장하도록 규정을 만드셨습니다. 그 백성들이 잘못된 길에 빠졌을 때 충성된 선지자들이 진리를 선포하여, 현실에 대한 거짓된, 허위적인 이해를 규탄하고 이스라엘에게 온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들을 살아내라고 촉구했습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 외침을 전면에 불러내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마태 5:17)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과 관련해서 그가 오신 목적을 강조하셨습니다. 로마 제국과 성전 엘리트들이 종족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그리고 사람들이 제국의 금고에 얼마나 헌금했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가치를 정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한걸음 담대하게 나서서 선지자의 외침을 외치면서 대안적인 스토리를 외치셨습니다. 이 스토리 안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실 때가 왔을 때 그 제자들에게 맡기신 소명의 차원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같이 말씀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 20:21-22)


똑같은 부르심이며, 똑같은 성령입니다. 폭넓게 넉넉히 포용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는 창조세계가 있도록 수면 위에서 운행하신 그 성령님이십니다. 종교적인 외식의 껍데기를 찢어버리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참된 소명으로 복귀하여 그들의 국경/경계선 바깥에 있는 자들에게 복이 되라고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으사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를 전하고 살아내며, 불가촉 천민들을 다가가 만지시며 언저리에 밀려난 사람들을 추켜세워주시며 평가절하된 사회의 존엄을 긍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바로 그 성령이 오늘날 모든 예수를 따르는 이들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스토리 가운데 속하게 되는 일에 대한 스토리를 써나가기를 열망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들과 장애물들이 인종차별적이며, 종족적이며 문화적이며 종교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이라면, 그 편견들과 장애물들을 기꺼이 성령님이 깨뜨려 부숴버리도록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성공과 안녕과 특권과 권리의 공적인 내러티브들 가운데 자리하고서 경쟁하고 있는 신들이 우리가 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가족들과 공동체들을 찢어발기고 유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오늘날의 이교도들처럼 그 신들을 숭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개혁파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만인제사장 주의에 대해서 립서비스 정도는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들이나 교회질서나 혹은 젠더나 인종이나 종족성과 관련된 학문적인 요구사항이나 편견들이 수많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서 그들이 자신들의 부르심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지 못하게 많은 것을 박탈하고 있지나 않을까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게 해주고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으며, 혹은 어떤 사람들은 일급 계층으로 삼고 다른 사람들은 이류로 분류하게 만드는) 구조들과 제약사항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도록 강권하고 있는 성령님의 자극과 재촉에 응답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온 창조세계를 향해서 의도하셨던 충만한 삶을 사람들에게서 박탈하고 있는 경제 시스템들을 담대하거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의 경제를 전반적으로 구현하는 공동체들이 되기 위해서 한걸음 나서겠습니까? 북미주 개혁교회의 공동체들과 멤버들과 벗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퍼져나가며 다시 새롭게 질서를 만들어나가면서 포용해 나가는 이 스토리에 뛰어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존재 방식들로는 어떤 것이 요구될까요? 우리는 어떤 스토리를 써나가야 하겠습니까?





Ruth는 Resonate Global Mission의 선교 리더십의 리더로 섬기고 있다.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아름답고도 깨어진 이 세상을 품으며 그는 평화와 정의를 보기를 갈망한다. 한 사람의 아내로, 그리고 많은 이들의 어머니로, 신학자로, 선교학자로, 교육가이자 이야기꾼으로, Ruth Padilla DeBorst는 모국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수십년간 통합 선교를 위한 리더십 개발과 신학 교육을 해 왔다. 남편 James와 함께 Comunidad de Estudios Teológicos Interdisciplinarios (CETI – www.ceticontinental.org)를 이끌고 있다. CETI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석사와 수료증 프로그램을 가진 학습 공동체이다. 그는 Resonate Global Mission과 협력하여 INFEMIT (International Fellowship for Mission as Transformation –www.infemit.org) 네트워킹 팀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으며 Arocha와 Oxford의 선교 센터 이사로 섬기고 있다. 그녀와 James는 Casa Adobe 국제 크리스천 커뮤니티(www.casaadobe.org)의 동료들과 함께 코스타 리카에 살고 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위튼 컬리지에서 학제간 연구로 석사, 보스톤 대학에서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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