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med Worship] 평범한 삶을 위한 성화
원문: Reformed Worship, Sanctification for Ordinary Life by James K. A. Smith, 칼빈대학교 철학과 교수

종교개혁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사랑받는 방식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주인공으로 한 영웅담이다. 바울의 법정적 복음을 새롭게 깨닫고 확신에 찬 어거스틴Augustine 수도회 수도사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힘차게 못 박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종교개혁은 이신칭의에 관한 일종의 중세판 블로그 게시물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리고 이 글은 공개 논쟁, 막후 음모, 교활한 악당들, 그리고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고 외치는 고독한 「브레이브하트」 영웅이 등장하는 신학 액션 어드벤처의 도화선이 된다.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도 있다.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그리고 최근에는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자들이 강조해 온 관점이다. 이들은 종교개혁을 좁은 의미의 신학 논쟁으로만 보지 않고, 사회적 삶의 형태, 곧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심을 둔 더 넓은 기독교 개혁 운동으로 본다.
평범한 삶의 성화
테일러의 설명에 따르면, 개신교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와 근대 초기에 일어난 여러 '개혁' 운동 가운데 하나로서, 중세 기독교 세계의 왜곡된 사회 구조에 맞섰다. 특히 종교개혁은 당시 형성된 이층 구조의 종교에 문제를 제기했다. 수도사, 수녀, 사제(이른바 '포기의 소명')가 위층을 차지하고, 가정('세속') 생활에 매인 나머지 모든 사람은 아래층의 이등 영적 시민으로 밀려나 있었다. '종교인'은 예배하고, 나머지는 그저 일할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종교개혁의 진정한 혁명적 영향은 비텐베르크보다 제네바에서 비롯되었다. 존 칼빈John Calvin과 그의 후계자들은 이 이층 구조, 곧 거룩함과 세속을 나누는 구분을 거부했다. 그들은 삶 전체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했다. 모든 소명이 거룩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적 수고가 하나님의 세상을 돌보는 일의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 세계에 주님의 것이 아닌 곳은 단 한 치도 없으므로, '세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바로 테일러가 말하는 "평범한 삶의 성화"다. 한편으로 이는 평준화 효과를 가져왔다. 수도사가 농부보다 더 거룩하지 않고, 수녀가 어머니보다 더 거룩하지 않다. '종교적' 소명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복에 이르는 지름길로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거절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다고 포기의 소명이 깎아내려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신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가정생활에 참여한다고 해서 거룩함을 추구할 의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평범한 가정생활이 성화의 자리로 들어 올려지고, 자기 포기가 평범한 삶 속에 녹아든 것이다.
그래서 정육점 주인도, 빵 굽는 사람도, 양초 만드는 사람도 각자의 '세상적' 자리에서 인정받는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는다. 바로 이 세상 속의 거룩함과 거룩한 세상성의 상호작용을 훗날 막스 베버Max Weber는 "개신교 노동 윤리"라고 불렀다.
삶 전체가 예배다
이 "평범한 삶의 성화"는 종교개혁 유산의 핵심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권면을 받는다(고린도전서 10:31). 삶 전체가 예배가 될 수 있다. 실험실에서든 법률 사무소에서든, 가정을 꾸리든 미식축구공을 차든, 땅을 경작하든 점토로 조각을 하든, 우리의 모든 문화적 노동은 왕께 드리는 찬양의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삶 전체가 예배"라는 원칙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특히 '영역'들 사이의 경계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단속하는 일종의 변종 카이퍼 주의와 결합할 때 그렇다. 카이퍼 자신보다 더 카이퍼적인 흐름이라 할 만하다! 그 논리는 이렇다. 삶 전체가 예배라면, 교회의 모임 예배는 선택 사항, 어쩌면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도서관과 실험실이 예배당과 동등하거나, 심지어 예배당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평범한 삶의 성화"는 예배당을 비우라는 지침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의도한 바였을까? 아니면 종교개혁자들의 본래 취지가 왜곡된 것일까? 마치 길게 이어진 전화 게임처럼, 종교개혁자들이 처음에 "삶 전체가 거룩하다"고 속삭였는데, 그 말이 줄을 따라 전달되면서 뒤틀려 결국 "교회가 왜 필요해?"로 끝나 버린 것은 아닐까?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는 네덜란드에서 큰 영향력을 끼친 목사이자 교수, 정치인으로, 1901년에는 네덜란드 총리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을 주창하며, 신앙이 개인의 삶과 공적 삶 모두와 맞닿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권적으로 일하신다고 강조했다. 카이퍼는 예배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여 Onze Eredienst(우리의 예배)라는 책을 썼다.
표현과 형성
"삶 전체가 예배"라는 원칙의 이러한 과잉은 종교개혁 이후 우리가 들인 나쁜 습관, 곧 예배를 '표현'으로 축소하는 경향의 일부다. 종교개혁 이후, 특히 근대의 흐름 속에서 현대 기독교의 상당 부분은 예배를 오직 '위를 향한'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자와 함께 성부께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는 행위로만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인 동기이자 이해다. 우리가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소리 지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찬양하도록 지음받았다. 성경이 그리는 역사의 비전은 요한계시록에서 시편 150편의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권면을 실연하는 예배하는 무리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주의적 예배 이해가 모더니티의 가장 나쁜 측면들에 어떻게 일조하는지도 쉽게 볼 수 있다. 표현으로서의 예배는 개인주의의 소용돌이에 쉽게 휩쓸린다. 그렇게 되면 모여서 드리는 예배조차 예배자 각자가 '내면의' 헌신을 표현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해진다. '진정성'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것이 바로 이 모델이다.
“삶 전체가 예배”라는 원칙을 내세워 주일에 모여 드리는 예배를 사실상 선택 사항으로 여기는 입장들의 배후에도 바로 이 표현주의가 있다. 이는 자연이라는 '교회'와 산 위의 일출이 주는 거룩한 경험을 열렬히 예찬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다"는 상투적 주장의 '개혁주의'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 전체에 걸쳐(종교개혁을 포함하여) 예배를 표현 이상의 것으로 이해해 왔다. 기독교 예배는 형성formative의 실천이기도 하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된 행위자이신 '아래를 향한' 만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우리가 하는 무언가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Worship isn’t just something we do; it does something to us. 예배는 우리가 말씀과 성례로 양육받는 자리다. 우리는 말씀을 먹고, 생명의 말씀이신 떡을 먹는다. 이러한 예배 이해는 종교개혁 유산에서 똑같이 중심적이며, John Calvin이 남긴 유산의 핵심이기도 하다.
말씀과 성례가 성령의 형성하시는 능력이 특별히 흐르는 통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예배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말씀과 성찬상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예배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역사하는 독특한 '거점'임을 인식한다면, 예배당은 하나님의 선한 세상 속 다른 어떤 공간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찬양하는 백성으로 빚어지는 곳이 바로 예배당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예배 안에서 우리는 말씀과 성례에 묶여 있는 성령의 독특한 약속을 받는다.
(혹시 카이퍼 사상 단속반에서 걱정하고 있다면, 카이퍼 자신도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적 노동cultural labor에 참여하는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기독교 예배로 모이는 '제도'로서의 교회와 "필연적 연결" 속에서 일한다. 말씀과 성례를 중심으로 한 모임 예배의 형성적 실천에 깊이 잠길 때, 우리는 문화 갱신의 일꾼으로 빚어지고 준비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대신할 수 없다. 오히려 유기체는 제도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평범한 삶을 위한 성화
말씀과 성만찬을 중심으로 모이는 기독교 예배는 단지 우리의 표현을 위한 무대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빚으시고 변화시키시는 자리다. 모여 드리는 예배의 실천에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것은, 바로 그 형태를 통해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불러들이시기 때문이다. 의도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예배의 형태에는 하나의 논리가 있다. 그것은 복음을 거듭거듭 재연함으로써 우리의 습관을 형성하고 다시 빚어 간다. 성례적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예배에 우리 자신가 깊이 잠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전하는 대사로 충분히 빚어지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종교개혁자들은 평범한 삶의 성화를 올바르게 강조했지만, 말씀과 성례를 통해 성화되지 않고도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직관 안에는 우리의 승리주의적 경향에 대한 유익한, 심지어 예언자적인 교정이 담겨 있다. 문화 갱신에 대한 개혁주의의 비전은 그 나름의 '행동주의', 곧 우리가 이루는 문화 변혁의 일에 대한 자신감을 낳을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때때로 '문화를 변혁'하고 샬롬을 추구하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선한 의도로 시작한 활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다가 결국 제도로서의 교회를 내버리게 되는 것이다. 삶 전체가 예배라고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배를 '경건주의적'인 것, 곧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고되고 복잡한 일로부터의 도피로 깔보며 빈정거린다.
그러나 카이퍼가 강조했듯이, 우리가 왕의 시민으로 습관화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문화 형성이라는 거대한 과업을 끝까지 감당할 길은 없다. N.T. 라이트가 일찍이 이 지면을 통해 조언했듯이 말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결코 단순히 실용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프로그램을 짜서 이 일을 하러 가면 된다"는 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William Wilberforce 같은 사람들의 삶을 읽어 보고 다시 생각하라.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기도가 필요하고, 성례가 필요하며, 인내하는 신실함이 필요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상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formed Worship, 2009년 3월).
우리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평범한 삶을 성화시키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성령으로 성화되어야 한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되려면, 예배당은 우리가 그 방법을 배우는 자리다.
칼빈대학교 철학과 교수
사진: ‘A Village Fair, with a Church behind’, Isack van Ostade 작 | Royal Collection,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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