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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rmed Worship] 우리 삶에 어울리는 부활절 by Scott E. Hoezee


성경 속 부활절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의 중심에 있는 이 극적인 사건은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일부 복음서에서 생략되었지만, 부활절 이야기는 어떤 복음서도 생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복음서는 서로 다르게, 그리고 동시에 묘하게 닮은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가복음은 그 특유의 간결함을 잃지 않습니다. 마가는 복음서를 시작할 때부터 빠르게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세례, 그리고 40일간의 시험은 단 13절 안에 끝납니다. 비교해 보면,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까지 1,500단어(영문 기준), 누가는 무려 3,800단어를 사용합니다. 반면 마가는 단 280단어로 그 모든 과정을 정리해버립니다.


마가복음의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끝맺음도 간결합니다. 부활절 이야기는 단 8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놀랍게도 이야기의 끝은 무덤을 떠나는 여인들의 충격과 혼란, 그리고 침묵으로 마무리됩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마가복음의 마지막 단어는 gar, 즉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인데, 제 그리스어 교수님에 따르면 헬라어에서는 문장을 그런 접속사로 끝내는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마가가 이야기의 끝을 “여인들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이라는 여운과 함께 마침표 대신 말줄임표로 마무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는 이야기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실제 문법적 의미가 어떻든, 마가복음 16장 8절은 분명히 작가가 의도한 바와 같은 수사적 효과를 줍니다. 부활의 이야기인데, 혼란스러운 침묵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보다 단 두 절을 더 사용해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가에서는 두려움 속에 침묵하던 여인들이 마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그러나 비록 그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다리를 붙잡고 경배를 드리긴 하지만, 여기서도 예수님의 첫 마디는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의 첫 반응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쁨이나 환희가 아닌, ‘두려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려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80마일(약 130km)을 가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전하게 하십니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이 거리의 도보 소요 시간은 약 26시간입니다!)


누가는 마태보다 두 절을 더 추가하여 부활 사건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도 예상과는 다르게, 처음 소식을 듣는 이들의 반응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회의적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말을 남성 제자들은 “허튼 소리”로 치부하고, 베드로는 흥미가 생겨 무덤에 가보지만, 정돈된 수의만 확인한 뒤 의아해하며 돌아갑니다. 물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의 만남이나 그날 저녁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장면은 이후에 더해지지만, 부활절 아침에 한정하면 그 역시 담백하고 간결합니다.


요한복음은 부활절 아침 이야기를 18절로 가장 길게 다룹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시작은 혼란입니다. 요한은 여인들이 천사를 만났다는 언급 없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만 전합니다. 이는 무덤이 도난당했을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소식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 확인하게 만들고, 그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요한은 본문 중간에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명확히 밝힙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부활절 아침의 몇 안 되는 기쁨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에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하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고 기쁨의 탄성을 터뜨리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설교자나 성경 해석자로서 이처럼 예상 밖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부활절 아침, 우리 교인들은 기쁨과 환희에 대한 메시지를 기대하지 않을까요? 부활의 아침에 성경의 등장인물들은 혼란에 빠져 있고, 오히려 ‘두려움’이 지배적인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해야 할까요?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또 다른 통찰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승리의 이야기’를 ‘승리답지 않게’ 전하는 것에는 아이러니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복음서를 ‘아는 이들’로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명이 죽음을 이긴 우주적 승리임을 압니다. 그렇기에 복음서 기자들처럼, 그 이야기를 과장되거나 화려하게 꾸밀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서 속 부활절 아침의 차분한 분위기 속에는 오히려 깊은 확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목회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부활절은 항상 어둠 속에서 시작됩니다. 단지 해가 뜨기 전의 물리적 어둠만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영적 어둠 속에서도 말입니다. 성경의 부활 이야기는 두려움과 의심, 혼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포됩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낙심한 제자들 곁에 예수님이 다가가신 것처럼,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 곁에 조용히 찾아오신 것처럼, 부활은 우리 삶 속 어둠과 혼돈 속으로 찾아옵니다.


복음서들의 부활절 아침 이야기는 우리가 예상하듯 장엄하고 극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정성이 있고, 오늘날 우리의 삶에 더 잘 들어맞습니다. 우리가 슬프고, 두렵고, 혼란스럽고, 의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 곁에 찾아오십니다. 복음서는 바로 그런 우리에게 맞는 부활절 아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로서, 부활절 아침에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고 목회적으로도 섬세한 접근이 될 것입니다.


스콧 E. 호에즈Scott E. Hoezee

칼빈신학교 설교센터Center for Excellence in Preaching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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