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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은 목회의 도구입니다. by 심재승 교수


심재승 교수 (Rev. Jay J. Shim)


Dort University

신학 교수



 

되돌아 보며


저는 20대 중반에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려고 로스엔젤레스의 한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가 복음을 새롭게 접하였습니다. 새로운 땅에서 가진 것 없고 초라한 제 젊은 시절에 복음은 찬란한 기쁨이었고, 꿈을 바꾸게 하였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게 하였습니다. 몇 차례 금식기도를 한 후에 저는 그렇게 좋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목회를 하기로 결심하고 대학부터 다시 다니는 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미전역의 학교들로부터 카탈로그를 받아서 보고 그중에 칼빈대학을 선택하고, 1986년부터 CRC교회에 속하게 된 것은 소중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칼빈대학에서 철학을 하고, 칼빈신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하면서 신학에 눈을 뜨고, 교회와 목회를 위한 학업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원래 가졌던 카톨릭 신앙과 로스엔젤레스에서 공부했던 오순절 신앙, 그리고 장로교 신앙 사이에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개혁신학에서 찾으며, 돌이켜 보면, 나중에 직업을 가지기 위함보다 “나를 위한” 공부를 했습니다. 조직신학으로 학위를 마친 후에 몇 학교에서 강의하다가 Dordt University에서 20년간 신학교수로 가르치고 2023년 여름에 은퇴합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만나고, 가르치고, 대화하는 매번의 수업이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교회로서는 교단의 기관들과 연구위원회에 참여하였습니다. 한인 목회자들과도 교단 가입 목회자 교육 등 함께 일하는 기쁨도 여럿 가졌습니다.


개혁신학은 목회의 도구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개혁신앙과 목회에 관련하여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개혁신앙의 풍성한 폭과 깊이이며, 둘째는 신학이 목회를 위한 도구라는 점입니다. 일반화하는데 위험이 있겠습니다만, 한국교계에 전파된 개혁신학은 다분히 개인구원과 경건중심적인 영성 안에 정착한 신조중심적인 경향을 가집니다. 목적과 과정에 있어서 좁게 그러나 분명하게 정의된 이러한 신학은 곤고한 한국의 상황에서 필요했었고, 따라서 빠르게 정착하고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칼빈, 벌코프와 바빙크 등의 신학저서들이 전파되었으나, 번역과 전파가 다분히 한국의 신앙 스타일을 따라 이루어지면서, 개혁신학이 좁게 정의된 조직신학의 틀 안에서 사변적인 공부로 이루어지고, 신앙의 옳고 그름을 규정하는 리트머스 페이퍼와 같은 정적인 경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초대교회로부터, 특별히 종교개혁 이후 전개된 개혁신학이 가지는 형성하고 양육하는 역동적인 신학의 본래 특성이 퇴보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위에 언급한 개혁신학자들의 저서들을, 그들 자신들과 또한 리더보스와 보스와 같은 성경신학자들이 남긴 성경주해와 함께 읽는다면, 또한 그 후예들이 기독교인의 삶의 정황 안에 형성한 개혁신앙의 영성과 사고에 관한 것을 함께 읽는다면 훨씬 폭넓고 풍성한 신앙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여기 폭넓고 풍성한 신앙이란, 신앙의 폭을 넓혀 정통신학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의 의미를 깊고 넓게 깨달아 그것을 실제 삶에서 훨씬 의미있게 살 수 있음을 말합니다. 편협되게 이루어진 신학이 현학적이며 신앙고백을 정적으로 되풀이 하는 오류를 범한다면, 원래 개혁신학이 가졌던 바, 성경주해-신앙의 형성-기독교적인 사고의 형성-실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신학의 노력은 교회에 훨씬 역동적이고 의미있는 신학을 제공합니다.

신학을 하는 목적은 성경을 근거로, 과거의 신학을 도구로 사용하여, 복음을 현재교회에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따라서 신학은 목회를 돕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따라서 신학은 학생신분으로 시작해서 목회를 하는 동안 꾸준히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은 지식적인 면을 포함하지만, 현학적인 또는 심판적인 목적에 머물지 말고, 교회를 형성하고 양육하는 원래 목적에 적합하게 활용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신앙을 떠나고, 코로나 사태 이후 교인들이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걱정을 많이 듣습니다. 가나안 교인이라는 고통스러운 단어가 한인교계에 퍼진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목회하기 어렵다, 목회가 전투다 라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교회 안팍에서 들려오는 이러한 걱정들로 인하여 목회자들의 고충이 얼마나 클지 짐작됩니다. 그런 고충 가운데 있는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신학과 목회의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그것은 위에 언급한 바대로, 성경의 메시지를 현세대에 적합하게, 현세대의 언어로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요, 목회입니다. 성도들은 복음이 그들의 삶에 의미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쩌면 문제는 복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이 쪼들리는 삶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 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느냐고 묻습니다. 구원이 그들의 영혼과, 생각, 삶에 풍성하게 의미있느냐는 그들의 경건과 봉사활동 이전의 문제입니다. 전자에 확실한 의미가 있어야 후자가 가능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 답을 이신칭의에서 찾고 그것으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현재 교회의 어려움을 바로 그 이신칭의 신앙고백에서 찾습니다. 극단적으로 요약해서 편협되게 설교된 그 신학이 성도들이 구원을 개인적인 유익으로만 이해하게 하고, 영성을 영적인 영역에 머물게 하고, 궁극적으로 기독교적인 사고와 삶을 놓쳐버렸다는 반성이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해설해야 할 신학이 오히려 그것을 오해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반성에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죄의 굴레에서 나를 해방시켜서, 내 신분이 죄인으로부터 변화하여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복음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개인적인 복음을 창조로부터 새창조에 이어지는 훨씬 광범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 안에 계시합니다. 구원이 두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전자가 후자의 범위와 비전 아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것이 구원이 창조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은 구원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칼빈 이후 줄곧 역설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교회의 구세주이십니다. 사람은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관리하도록 창조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재창조되어 원래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재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이 새생명의 삶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삶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이고, 세상으로 보내어진 그리스도의 대사의 삶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구약의 언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신약에 일관되게 가르쳐집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의 관계는 율법을 지킴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율법을 행해야 했으며, 동시에 그렇게 삶으로 다른 민족에게 제사장 역할을 할 “이방인의 빛”으로 보내어졌습니다. 그 빛이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입니다. 구약에서 의롭다는 것은 다만 종교적인 의로움, 즉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위치만이 아니라, 의로운 삶, 즉 공의로운 삶을 포함합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예언서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수없이 많은 심판으로 증거됩니다. 구약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완성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믿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전인적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다”를 현재 의미하는 바, 다만 종교적인 신뢰나 의지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신뢰가 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은 그와의 관계에서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바울의 “오직 믿음”은 야고보의 “행위와 함께”와 반대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내일을 기다리며


저는 이신칭의의 이해를 복음을 현세대에 재생산하는 예로 들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성경주해 위에 신학을 세우고, 그로부터 설교와 같은 목회를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어서, 그만큼 간과되기 쉽습니다. 바쁘고 치열한 목회현장에서 아는 것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라, 목회자는 의식적으로 성경주해로부터 형성되는 신학에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경건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기도와 예배뿐 아니라, 목회는 기독교적인 사고의 형성을 포함합니다. 전통교회는, 특별히 개혁교회는 전인적인 구원을 강조하면서, 신앙을 이성의 기능으로부터, 그리고 신앙을 선한 행위로부터 분리하거나 대립관계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인간의 모든 활동을 주장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합니다. 수천년을 죄된 문화 안에 살아온 사람들의 생각이 단번에 변화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와 목회는 신앙을 성도들의 실제 삶에 충실하고 의미있게 적용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신칭의를 이렇게 삶에서 살 것을 가르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삶 자체가 영적 예배이며, 그것은 기독교적으로 생각을 변화했을 때 가능합니다.

개혁신학이 목회자를 위한 도구인 첫번째 의미는 성경주해를 바탕으로 개혁신학이 형성되었으며, 그러한 자료를 목회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은 성경을 개혁신학적으로 읽고 이해한 결과이며, 개혁교회는 그것을 목회에 적용합니다. 개혁신학이 목회의 도구인 두번째 의미는 개혁교회가 작성하고 목회에 사용한 영성과 세계관입니다. 성도의 개인적인 구속이 창조로부터 새창조에 이르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속 안에 그 위치와 목적을 가진다면,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세계관은 마땅히 그러한 하나님의 구속 안에 형성됩니다. 그것은 세상을 다만 죄된 세상으로 보아, 세상을 떠나는 탈세상적인 영성이 아니라, 또는 영적인 영역에 매몰되는 이원론적인 영성이 아니라, 온 세상을 자신에게 화목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에 동참하는 세상을 품는 영성입니다. 세상의 죄됨은 존재론적 이원론에 매어 둘 것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 점진적인 구원이라는 역사적인 시각 안에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곤고함은 죄된 세상이 주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그래서 구원된 후에도 악의 세력 아래 억눌리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그의 구속에 동참하는 성도로서 겪는 고통입니다. 성도의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주어진 자유를 자유롭게 포기하여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문화에서 남의 유익을 위하여 나의 자유와 기쁨을 포기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들리겠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하여 보이신 성도의 삶의 표본이며, 따라서 그의 생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고귀한 모습입니다. 더 자유롭게 사는 삶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에 있고, 더 큰 기쁨이 희생으로 나온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세계관을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서 형성하지 않는 사이, 성도들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세상 문화로부터 그것을 형성할 것이며, 그 결과로 그들은 삶에서 구원의 의미는 찾지 못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어떠한 구원을 이루어가고 계신가 라는 생각으로 신학의 작업과 수업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개혁주의 성경주해, 신학의 형성, 영성과 세계관으로 살기라는 주제 안에 한 책으로 모아졌습니다. 현재 그 책은 제가 가르쳐온 Dordt University Press에서 출판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한국의 출판사에서 한글로 번역하기로 했으니, 곧 한글판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CRC 교회의 목회자들과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 교제할 수 있을거란 기대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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