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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rmed Worship] 고통과 복음을 설교하라

For Pastors

Pulpit Care


Rev. Scott Hoezee

스캇 호에즈 목사

칼빈신학교(Grand Rapids, MI) 설교학 교수


하루는 내가 우리 교회에 다니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멘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종종 제가 목양에 더 시간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교회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고, 심방을 풀타임으로 담당하는 동료가 있어서 그런 내 생각을 언급했다. 나는 목회적 돌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는 내가 설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직무 내용을 정해줬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병원 심방을 하고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우리 사역에 있어 목양적 측면을 주도하지는 않았다.


내 고민을 듣자마자 친구는 강하게 말했다. “Scott 목사님, 매주 강대상에서 엄청난 목양을 하고 있잖아요!” 그는 이렇게 말한 이유를 곧이어 설명했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강대상에서 하는 목회적 돌봄에 대한 그 친구의 확고한 통찰에 마음이 끌렸다.

많은 설교자들에게 있어 설교 훈련을 받을 때 설교의 목양적 측면은 강조되지 않았을 수 있다. 나의 동료 댄후마 깁슨Danjuma Gibson이 알아차린 것 같이, 신학교에서는 설교와 목회적 돌봄을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중 일부는 설교의 주된 목적이 강해 스타일로 성경 본문을 한 구절씩 풀어내는 것이라고 들었다. 또 설교란 주어진 본문에서 교리적 진리를 추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던 어떤 이들은 교리적 진리가 설교의 핵심 목표가 될 수 있다. 우리 중 또 다른 사람들은 설교가 제자도를 위해 존재한다고 배웠을지 모른다. 따라서 결혼 생활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나 도덕적인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 또는 기도 생활을 심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할 일 목록”으로 모든 설교를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혹은 우리는 매 설교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을 위해 매주 시간을 들여 우리 모두가 가진 죄와 죄책감을 없애는 것에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배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대신 우리는 설교의 주된 목적이 목양, 즉 영혼 돌봄이라고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것이 설교의 전부는 아니지만 설교의 중요한 부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을 목회적 돌봄이라고 부르든 그렇지 않든, 흑인 설교자들은 이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왜 흑인 교회에서 설교가 그렇게 긴지 묻자, 신학자 제임스 콘James Cone은 세상에서 흑인들에게 당신들은 소중하지 않다고 일주일에 6일을 말하기 때문에, 주일에 그들이 자기 자신을 다시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 보게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조금 더 최근으로 거슬러 올라와, 오티스 모스 3세Otis Moss III는 그의 저서, 후기 영혼의 세상에서 설교하는 블루스 음악Blue Note Preaching in a Post-Soul World에서 설교를 블루스 음악에 비유했다. 모스는 블루스가 우리 영혼에 와닿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을 하나 하나 불러 주는데, 그것은 치유의 공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언급했다. 설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설교학 개론 시간에 나는 폴 스콧 윌슨Paul Scott Wilson 교수의 "세상의 문제"라는 설교 작성 범주를 사용해, 학생들에게 매주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아픔들을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 삶에는 질병 문제, 재정 문제, 직장 문제, 역기능 가정, 국가적 또는 국제적 위기, 전쟁, 불의, 인종 차별, 사고 등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윌슨 교수가 말했듯, 우리의 문제 중 일부는 삶의 수직축을 부러뜨리고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이 느끼게 한다. 또 어떤 문제는 가로축을 부러뜨리고 서로에게서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 어떤 문제는 한 번에 이 두 가지가 같이 오기도 한다.


설교할 때 목회자는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명명하는 것에 정직해야 한다. 우리는 삶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질 때,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며 “맞아요. 그게 바로 제가 어젯밤 새벽 2시 34분부터 5시 1분까지 잠을 못 잔 이유에요.”라고 생각하도록 설교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가정에 닥친 유별난 고통을 자세히 설명할 때, 사람들은 설교자가 바로 그 순간 자신들의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자리를 똑바로 고쳐 앉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설교자들이 이러한 일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통곡해도 괜찮다고 분명히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은 통곡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적합한 행동으로 여기도록 허락받았다고 느낀다.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하는 것, 상실에 대해 깊이 슬퍼하는 것은 믿음이 약하다는 표시가 아니라 강하다는 표시이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취한 자세가 아니라 신자들이 취한 자세이다. 이것은 우리가 외투와 함께 교회 로비에 걸어두어야 할 태도가 아니라, 성소로 직행할 수 있는 태도이다.


물론 설교에서 블루스를 연주하여 상처를 명명하는 것은 강대상에서 하는 목회적 돌봄의 시작에 불과하다. 윌슨 교수의 "세상의 문제"는 우리의 상처와 비애와 탄식은 설교에서 복음의 대화로 끌어오는 강력한 “세상의 은혜”와 만나야 한다.

흑인 설교 전통에 다시 호소하자면, 이것은 "찬양celebration"으로의 이동이다. 설교가 끝날 때 사람들을 일어서게 하는 것은 설교자가 감동적으로 결론을 맺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일어서게 하는 것은 설교 초반에 그들 자신의 바램과 필요, 후회와 고통이 분명히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능의 복음이 임하여 언약을 받고, 자유케 되며, 희망을 줄 때, 그것은 나의 언약, 나의 해방, 나의 희망,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는 나의 찬양celebration이 되는 것이다.

최근에 은퇴한 설교학 동료인 존 랏맨John Rottman 교수는 사람들이 이미 많은 부담을 안고 교회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강의하곤 했다.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강의실 앞을 걸어 다니며, "제 아내는 암에 걸렸고, 제 아이는 대학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제가 일하는 회사는 상황이 안 좋아서 사람들을 정리해고에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려움을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몸을 구부렸다. 마침내 그의 어깨에 맨 가상의 짐들로인해 거의 반으로 짓눌릴 때까지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일에 가장 불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의무와 해야 할 일 목록을 더하는 설교라고 그는 전했다. 사람들이 근심에 눌려 반쯤 몸을 구부린 채 교회에 들어왔는데, 설교로 인해 어깨에 짐이 더 많아져서 바닥에 턱을 긁히며 교회를 나서지 않길 바라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좀 더 똑바르게, 조금 더 가벼워지고, 조금 (혹은 많이) 더 희망에 차서 교회 밖을 나설 수 있길 바란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설교를 통해 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목회적 돌봄을 제공하길 바란다.



출처: CRC 교회사역부 Worship Ministry에서 제공하는 Reformed Worship 매거진 202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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